바흐는 1723년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교회의 칸토르(교회 작곡가 겸 성가대 지휘자)가 되어 교회의 음악파트를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교회 부속학교의 음악교사까지 겸하여 매주 칸타타와 성가곡을 비롯한 교회절기에 따른 곡들을 작곡하는 과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바흐의 종교음악들, 'B단조미사'를 비롯하여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마니피카트', '크리스마스오라토리오' 등이 이때 작곡되었습니다.
그중에서 ‘B단조 미사’는 1724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749년까지 무려 25여 년에 걸쳐 완성된 대곡입니다. 그러다 보니 바흐의 살아생전에 전곡이 연주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바흐가 평생 동안 사용하고, 발전시킨 음악양식을 기악과 성악으로 녹여내어 완성한 걸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각 음악이 작곡된 의도와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연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바로크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교회음악의 최고봉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감동과 영감을 주는 작품입니다. 바흐의 ‘B단조 미사’ 자필 악보는 독일 베를린 국립도서관(Staatsbibliothek zu Berlin)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 작품 중 제일 먼저 작곡된 곡은 세 번째 파트인 Sanctus인데,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 1724년에 작곡하고 성탄절 예배에서 초연되었습니다. 현악 3부, 오보에 3대, 트럼펫 3대, 6 성부 합창과 셋잇단음표와 가사의 3번 반복 등 숫자 3을 강조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였습니다.
바흐는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기에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금요일과 일요일에 열리는 음악회를 위해 바쁘게 활동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상급 기관으로부터 지속적인 간섭을 받았으며, 이들 기관 사이의 의견 불일치로 인해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더욱이, 교회 음악 작곡량의 감소를 이유로 감봉 처분을 받았고, 그가 제안한 교회 음악 개선안은 무시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흐는 1733년 작센의 가톨릭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에게 작센 궁정의 음악감독 임명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작성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교회 음악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기 위해 B단조 미사의 Kyrie와 Gloria를 첨부했습니다. 결국 1736년, 바흐는 폴란드 왕이자 작센의 선제후인 아우구스트 3세의 궁정 작곡가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1748년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에게 헌정한 Kyrie와 Gloria를 바탕으로 1724년에 크리스마스 예배용으로 작곡한 Sanctus를 수정하고, Credo, Agnus Dei 등을 마저 작곡하여 1749년 전체 미사형식(Kyrie - Gloria - Credo - Sanctus - Osanna - Benedictus - Agusdei - Dona nobis pacem)을 완성시켰습니다.
이 시기에 이미 시력이 많이 나빠져 수술을 두 번이나 하여 작곡에 집중하기에 기력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Osanna는 세속 칸타타 BWV 215 ‘Preise dein Glucke, gesegnetes Sachsen(너의 행운을 찬양하리, 복되어라 작센이여)’의 첫곡의 선율을, ‘Agnus Dei’는 1725년에 작곡한 결혼식 세레나데 ‘일어서라 달콤한 기쁨이여’의 선율을 패러디하였습니다. ‘Dona nobis paccem’은 ‘Gloria’의 4번째 곡 ‘Gratias agimus tibi’와 진행이 유사합니다. 이렇게 바흐는 자신의 평생의 유산을 모두 끌어 모아 미사통상문 형식으로, 교파를 뛰어넘은 그리스도교 본래의 신앙의 진수를 빠짐없이 남기고, 마지막 페이지에 ‘Soli Deo Gloria(오직 주께 영광)’이라는 말을 남기며 신앙적 울림을 후대에 전하고 있습니다.
1786년 아들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C.P.E. Bach)에 의해 함부르크에서 ‘Credo’가 초연되었고, 전곡이 공개되어 연주된 것은 1830년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바흐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부터였습니다. B단조 미사는 ‘h-Moll-Messe(하몰미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독일어로 ‘단조(조성)의 고(高) 미사’라는 뜻으로 ‘Missa Solemnis’와 같은 뜻으로 가톨릭교회의 완전한 미사형식을 말합니다. 바흐는 개신교 신자였지만 B단조 미사는 가톨릭 미사통상형식으로 온전히 쓰였기에 Hohe의 h를 따서 독일식 발음을 그대로 ‘하몰미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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