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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

쇼팽의 일생, 그리고 녹턴

by julianalmj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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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일생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은 1810년 3월 1일에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바르샤바 육군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던 프랑스 출신의 니콜라스 쇼팽이었고, 어머니는 폴란드 귀족인 유스티나 크지노프스카이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방학 때면 교외에서 마주르카, 크라코비아크, 폴로네즈 등 폴란드 민속음악을 접하며 자라났습니다. 7세 때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로 음악에 있어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이 무렵 그의 첫 작품인 폴로네즈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1822년부터는 바르샤바 음악원 창설자인 J. 엘스너에게 화성법과 대위법을 배웠고,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러시아 황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습니다. 

   1826년에 음악원에 입학한 쇼팽은 여러 문학도 공부하였으며, 여러 음악회를 통해 동시대의 음악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접하였습니다. 이 무렵 피아노 소나타와 변주곡 등을 작곡하였고, J.N. 후멜과의 친분을 통해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1830년 11월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 그의 고향인 폴란드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다른 폴란드 친구들처럼 입대하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강하게 그를 말리며 음악가로서의 이름을 알려 고국에 이바지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더욱 작곡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는 이 혁명이 러시아군에 의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실망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작곡한 것이 혁명 에튀드(작품 10의 12)라고 여겨집니다.

   1831년 9월에 파리로 이동한 쇼팽은 로시니, 베를리오즈, 리스트 등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지냈고,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C. 칼크브레너에게 피아노 연주를 배우려고 했지만, F. 리스트와 F. 힐러의 충고로 그의 개성이 훼손될 수 있음을 염려하여 그 생각을 포기하기도 하였습니다. 1832년에는 파리에서 첫 연주회를 개최하여 호평을 받았고, 이후로는 폴란드 귀족의 소개로 파리 사교계에 발을 들이며 창작활동도 활발히 이어갔습니다.

   1836년, 쇼팽은 드레스덴에서 어린 시절의 여자 친구인 M. 보진스카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약혼에 이르렀지만, 늘 몸이 약했던 쇼팽은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보진스카의 주변의 반대로 인해 결국 파혼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 주최한 파티에서 여류 작가인 조르주 상드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는 지극정성으로 쇼팽을 돌보며 그의 창작을 도왔습니다. 그동안 쇼팽의 주옥과 같은 명곡들이 쏟아졌습니다. 9년이나 지속되던 그들의 관계는 가정불화와 쇼팽의 건강 악화로 1846년 결국 헤어지게 됩니다. 이후로 쇼팽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었지만, 그는 금전적인 문제로 인해 1848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피아노 연주를 계속하였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개인교수 외에는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었고, 이어서 다음 해 가을에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2주 후인 10월 30일에 열렸고, 그의 유해 위에는 그가 바르샤바를 떠날 때 받은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었고, 그의 유언대로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교회에 보내졌습니다. 

   쇼팽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 곡입니다. 가곡이나 첼로, 플루트, 피아노 3중주 등의 작품도 있지만 그의 가장 뛰어난 분야는 피아노였고, 200여 곡의 피아노 곡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은 부드러운 선율에 의한 호모포니의 구성과, 반주를 화음적 패턴으로 제한하여 선율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그의 작품은 리듬과 프레이징에서 자유로운 구조를 사용하고, 화음에서는 불협화음의 사용과 반음계적 취향을 보여주며, 시대를 앞서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피아노 연주에서는 쇼팽이 페달을 사용하여 음색의 다양성을 높였으며, 약박을 강박에 가깝게 인접시키는 연주법을 사용하여 후세의 피아노 연주법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주르카 같은 민속 음악 형식을 사용한 작품에서는 폴란드 민속 음악의 특징인 드로운 바스와 교회 선법을 활용하였습니다.

   이렇듯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며 피아노에 있어 큰 획을 그었으며 그의 고향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는 5년에 한 번 그의 이름을 딴 쇼팽콩쿠르가 열립니다. 여기에서는 쇼팽의 작품만 연주해야 하며, 여기서 입상한 사람은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써 인정을 받게 됩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하여 찬사를 받았습니다. 

Image by  Ri Butov  from  Pixabay

녹턴 

    '쇼팽' 하면 흑건, 녹턴, 에튀드, 피아노 협주곡 1번 등 여러 가지 곡이 떠오르지만, 1827년에서 1846년까지 쇼팽은 21개의 녹턴을 작곡하였습니다. 녹턴은 밤에 어울리는 노래라는 뜻으로 '야상곡(夜想曲)'이라고도 합니다. 이 작품들은 연주회에서 자주 연주되며 완성도가 아주 뛰어납니다. 녹턴은 아일랜드의 작곡가 존 필드의 녹턴의 형식을 쇼팽이 더욱 발전시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녹턴은 오른손의 감미로운 멜로디와 왼손의 아르페지오의 활용은 필드의 작품의 특징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쇼팽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페달을 많이 사용하여 비극적 여운과 감정의 깊이를 더하고, 드라마틱한 선율을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고전작품의 리듬을 가져오고, 오페라 아리아를 모방하기도 했는데, 그와 가깝게 지냈던 프란츠 리스트는 쇼탱이 벨리니의 벨칸토 오페라의 아리아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쇼팽은 또한 대위법을 활용하여 곡의 드라마틱한 면을 확장하였습니다. 쇼팽의 녹턴은 필드가 만든 기본적인 구조위에 모차르트의 소리를 더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결합하여 자신만의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쇼팽의 녹턴은 1번부터 18번까지는 생전에 출판을 하였고, 19번부터 21번까지는 쇼팽이 폴란드에 있을 때 작곡한 곡으로 1번보다 더 이전에 작곡한 작품입니다. 심지어 21번은 1870년 처음으로 출판되었는데 녹턴이라고 표기하지 않았지만 쇼팽의 녹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쇼팽의 녹턴은 각각 다양한 템포와 조성으로 되어있지만, 대체로  A-B-A의 세 도막 형식으로 보입니다. 2번부터 21번까지는 주제음을 계속 변형하며, 장식적인 음을 추가하면서 변화를 주며 곡을 마지막까지 이어갑니다. 7번과 8번부터는 두 곡씩 묶어서 출판하였는데 주로 느린 템포를 사용하였습니다. 쇼팽의 녹턴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Op. 9 No. 2와 Op. 27 No. 2 가 특히 인기가 많습니다. 

   쇼팽의 녹턴은 이후 브람스, 바그너와 같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는데, 그들은 쇼팽의 단순한 멜로디 작곡법을 차용하였고, 멘델스존, 슈만, 리스트 등은 쇼팽의 천재성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https://youtu.be/tTGEo3scnq8?si=uCkYztvdzZ3-h9xB

조성진 녹턴 Op. 9 No. 2

https://youtu.be/fku6ZSpCQk4?si=hzzal6zX-Rvfbi9Q

임윤찬  녹턴 Op. 9 No. 2

https://youtu.be/xL-CU_UBk0U?si=qIMpWh48617nrIIA

임동혁 녹턴 Op.27 N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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